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제국 육군/헌병 (문단 편집) == [[조선군(일본제국)|조선헌병대]] == [[1904년]] [[러일전쟁]] 당시 한국주차헌병대를 설치한 것이 시초다. [[일제강점기]]의 경우, 도시나 개항장은 [[일본제국 경찰|보통경찰]]이 담당하고 농촌이나 국경지대, 의병출몰지역 등 전원지대의 경우 헌병이 담당하는 체계였다. 그래서 도시에는 [[경찰서]]와 현재의 [[파출소]]에 해당하는 주재소가 있었고, 농촌에는 헌병대가 있는 식이었다. 많은 사람들의 혼동과 달리 엄연히 [[조선총독부]] 경찰은 다른 나라의 식민지 경찰들처럼 [[일본제국 경찰|일본 제국의 보통경찰]]에서 구성했다. 그 악명높은 고등계의 경우도 헌병이 아닌 [[조선총독부]] 경찰에서 두고 있었다. 경찰과 헌병 둘 다 일본 본토에서 파입된 인원들과 조선인 경찰관/헌병보조원이 혼재되어 있었다. 경찰의 경우 검은색 제복 착용에 남부식 [[권총]], 그리고 [[경찰도|경찰용 세이버]]로 무장하고 헌병은 우리가 흔히 아는 [[일본군]] 군복을 착용하여 구별이 가능했다. 권총은 [[일본군]]도 남부 권총을 사용했으며 칼은 군도를 패용했다. [[국사]]나 [[한국근현대사]] 시간에 "[[헌병경찰제도|헌병 경찰 시대]]"라는 말이 나온다. [[1910년대]] [[일제강점기]] 초반, 즉 초대 총독 [[데라우치 마사타케]] 시절의 조선에서도 헌병이 일반 [[경찰]] 업무의 상당부분을 담당했다. 초대 주차군 헌병대장이 경무총감([[조선총독부]]의 경찰총수)을 겸임했다.[* 초대 주차헌병대장은 [[아카시 모토지로]] 소장이었다. 그는 [[러일전쟁]] 당시 [[블라디미르 레닌]]에게 막대한 공작금을 전달했던 첩보전을 맡은 공로가 있다. 그는 [[http://www.kyosu.net/news/articleView.html?idxno=41042|러시아에 대한 교란공작]] 기법을 문서로 남겼는데 이 보고서가 [[1930년대]] [[일본군]] 정보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.] 그리고 그는 조선인 헌병보조원들을 대량으로 채용했다. 당시 [[한반도]]내 경찰과 헌병을 통합 지휘하는 [[조선총독부]] 경무총감은 헌병출신자들이 담당하며, 각 도별로 설치된 경무부장 전원이 헌병이었다. 한일합방이 되는 [[1910년]]에는 보조원을 포함한 헌병은 8천 명, 경찰은 6천 명으로 헌병이 주로 치안을 담당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. 헌병은 헌병분견대-헌병분견소-헌병파견소 체계로 전국에 설치되어 있었다. [[1914년]]에는 헌병대 배치가 완료되었다. 경찰기관 732개소에 경찰이 5,756명이었는데, 헌병기관은 997개소였고 헌병이 11,159명이라 헌병이 더 많았다. 간부급이라 할 수 있는 경무부장(13명), 경무관(3명), 경시(36명) 중에서 한국인은 경시 한 명뿐이었다. 반면 순사보 3,067명과 헌병 보조원 4,749명, 정탐 3,000명 등 최하위직은 모두 한국인이었다. [[1915년]]에는 1개 헌병대사령부, 13개 헌병대본부, 77개 헌병분대, 318개 헌병파견소, 521개 헌병출장소를 두어 삼천리 방방곡곡 삼엄한 [[헌병경찰제도]] 아래 놓이게 되었다. [[1916년]] 2대 [[조선총독]]으로 [[하세가와 요시미치]]가 부임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. 그는 부패한 인물이어서 사리사욕을 채웠는데 이 때문에 헌병대의 사찰 예산이 삭감되었다. 그런 관계로 일제의 [[무단 통치]] 감시가 약해졌으므로 [[3.1운동]]도 충분히 막지 못 하게 된다. [[3.1운동]] 이후 [[문화 통치]]를 시행하면서 [[일본제국 경찰|보통경찰]]을 증원함에 따라 헌병들이 하던 업무도 완전히 [[순사]]들이 이어받았지만 여전히 헌병들이 위세를 부렸다. 즉 헌병과 경찰이 병립했다. [[독립운동가]]들이 재판을 받을 때도 헌병들이 [[법원]]을 경비했다. [[군사재판]]도 아닌 일반재판에서다. 계급체계는 위관급은 경시, [[준사관]]/[[하사관]]급은 경부, [[상등병]]은 순사와 동등했다. 헌병보조원은 인력이 부족하여 [[소학교]]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갖춘 조선인들을 모집하여 충당한 계급으로 같은 목적의 순사보와 동일했다. 헌병보조원은 엄밀히 말해 군인이 아니라 [[군무원|군속]]이었다. 조선인 헌병보조원이 10년 이상 복무하면서 공(주로 독립투사 탄압)을 많이 세우면 상등 헌병보로 진급할 수 있었다. 상등 헌병보는 순사와 동등하므로 경찰의 순사로 소속을 옮기기도 했다. 하지만 조선인은 헌병대에서 높은 계급으로 올라갔던 기록이 거의 없다. 상당히 악질 [[친일파]]라도 상등 헌병보나 [[오장]]([[하사]]) 정도였다. [[1944년]] [[신상묵]]이 군조([[중사]])로 승진한 것이 조선인 최초의 일본 헌병 [[중사]] 진급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. [[3.1운동]] 당시에는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다. 또 [[동양척식주식회사]]가 농민들에게 땅을 강탈할 때도 헌병대가 무력을 제공했다. [[http://shindonga.donga.com/3/all/13/100927/3|[[1925년]] 당시 반항하는 할머니가 있었는데]] 일본인 헌병 [[상등병]]이 할머니의 목에 포승줄을 감고 군도 자루와 몽둥이로 두들겨 패 즉사했다. 한편, 헌병대는 '문화적 통치' 역시 시도했다. [[1919년]] [[8월]] [[헌병경찰제도]]가 폐지되며 18,000명에 달하던 헌병이 2,000명 이하로 감축되었고 이중 상당수가 일반경찰로 전직 하였다. [[1933년]] 조선헌병대사령부는 당시 [[일본인]]들의 조선인 차별을 고발하는 내용을 내부자료로 펴낸 후 사회지도층과 고위관료들에게 한정해 배포했다.[* 오늘날 이 문서가 공개되어 '조센징에게 그러지 마'라는 책으로 번역되어 있다.] 당시 조선헌병대 사령관 [[https://ja.m.wikipedia.org/wiki/岩佐禄郎|이와사 로쿠로]] 육군 소장(최종 계급 중장)이 밝힌 바로는 [[일본인]]의 [[인종차별]]로 인해 조선인들의 항일의식이 깊어진 상황에서 무언가 '계기가 되는 사건'이 발생하면 저항 운동이 발생해 경찰 및 헌병들이 많은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게 요지였다. 즉 차별의 도덕적 부당함을 성토하는 측면보단 뒷수습하는 경찰과 헌병의 행정적 측면에서 골치아프니 긁어 부스럼 좀 만들지 말고 깽판도 적당히 치라는 심리에서 나온 글이다. 패전시 조선헌병대는 사령관 다카치 시게로 육군 소장 이하 4,030명이었으며 주요 주둔지는 [[경성부]], [[평양시]], [[부산광역시]], [[대구광역시]], [[대전광역시]], [[청주시]], [[전주시]], [[광주광역시]], [[춘천시]], [[청진시|나남]], [[함흥시]], [[해주시]]였다. 역대 조선헌병대사령관의 직책은 요직 중의 하나로 이중 상당수가 영전하였다. [[조선인 일본군]]으로는 [[김창룡(군인)|김창룡]], [[신상묵]]이 알려져있다. 물론 모두 [[친일반민족행위자]] 논란이 일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